영원한 스승님과 문학
(
정호원 선생님
)
김 현 우
(소
설가/전 창녕문인협회장
)
◆
이야기 선생님
정호원 선생님을 나는 동포초등학교
3
학년 때 만났다
.
그때가
1948
년으로
6·25
동란이 나기
2
년 전으로 참 가난했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제대로 없는 시절이었다
.
그런 가난한 아이들에게 깜작 놀랄 일이 생겼다
.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일로
4
월인가
5
월인가 반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나가 출입구 계단에 키 크기대로 줄 지어 앉혀놓고 사진사를 불러 기념촬영을 한 일 때문이다
.
그 시절 졸업 사진이 아니면 학교에 사진사를 불러 사진을 찍는 일이 거의 없었던 때였다
.
그때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사진을 찍었다
.
물론 누님이 고추 내놓은 나를 안고 찍은 카메라 사진이 있긴 하였지만 하여간 그때 외 처음 찍는 사진이었다
.
아이들 대부분 다 나와 같은 처치라 사진 찍히기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잘 찍히겠다고 고개를 빼들고 검은 보자기를 덮어 쓴 사진사와 커다란 사진기를 응시했다
.
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
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이야기를 잘 해 주시기로 유명했다
.
선생님의 이야기는 매 번 달랐는데 국어를 가르치는 시간이면 으레 짤막한 얘기 한 토막 맛보기로 하셨다
.
그때 들은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50
여년이 지난 지금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하여간 우리는 귀를 한껏 쭝끗해 가지고 선생님 이야기 한 구절이라도 잘 들으려고 발싸심을 했던 것이다
.
아마 내가 동화작가나 소설가가 된 가장 먼 계기가 바로 선생님의 구수하고도 재미난 이야기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
3
학년 겨울방학 때 작문
(
글짓기
)
숙제가 있었다
.
그때 나는
<
눈
>
을 주제로 글짓기 숙제를 해 갔다
.
지금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 눈이 오는 날 우리 형제들이 눈싸움을 하던 일을 쓴 듯하다
.
선생님은 그 작문을 반 아이들 앞에서 읽게 하고
“
아주 잘 쓴 글이야
.
앞으로 훌륭한 문인이 되겠어
.”
하고 칭찬을 해 주셨다
.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되자는 황당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이었다
.
사실 중학교 때 내가 쓴 글이
3
년 동안 한 편도 교지
(
校誌
)
에 실린 적이 없다
.
내가 쓴 산문은 너무 길어서 내가 지은 시는 너무 시시해서 국어 선생님 눈에 들지 못해 실리지 않았다
.
그렇지만 초등학교
3
학년 때 정호원 선생님의 칭찬 한 마디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꿈을 키워 나갈 수 있게 했던 것이다
.
◆
구연동화집
『
용궁의 개
』
수업 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이야기는 후에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
그래서 우리는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였는지 알 수 있었다
.
선생님은 그동안 구연동화에 대한 열정을 키우시면서 연구하여
<
소년동아
>
와 월간지
<
어깨동무
>
등에 많은 동화를 발표하셨다
.
이것은
1970
년대 초반부터 였는데
<
소년동아
>
에 동화
‘
좋은 원님
’
등
5
편을 발표하셨고
,
당시 초등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월간지
<
어깨동무
>
에
‘
조이삭과 스님
’
등 많은 동화를 발표하여 구연동화의 새로운 경지를 닦으셨던 것이다
.
남다른 노력으로 중앙지에 동화를 발표하시면서 그간에 아이들에게 들려주시고 발표한 작품들 중 아주 재미나고 아이들에게 유익한 이야기들만 모아 구연동화집을 출판하셨는데 그 당시 보기 드문 일이었다
.
구연동화집
『
용궁의 개
』
는 모두
41
편의 이야기를 실었다
.
표지화
,
삽화
,
제자
(
題字
)
는 박천웅 선생이 장정은 황광주 선생이 출판사는 부성문화사로
1976
년
3
월
10
일 발행으로 모두
84
면이며 정가는
500
원이었다
.
목차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오는 전설과 설화들이 있는가 하면
<
검사와 여선생
>
같이 신파 연극으로
<
신소설
>
류의 소설로 왜정 때부터 인기가 높았던 소설까지 그 속살만 빼 모아 놓기도 하였다
.
*
실린 구연동화
41
편의 목록
여우와 생선장수
,
피리를 잘 부는 할아버지
,
귀뚜라미가 된 효자
,
쥐에게서 몰매를 맞다
,
노다지 보석산
,
이상한 피리
,
이상한 달걀
,
만다라산의 사자
,
용궁의 개
,
꽃피우는 할아버지
,
첫 꿈과 도깨비
,
토끼와 용왕국
,
효자와 홍시
,
지혜로운 원님
,
조알
10
개와 소
,
약코
,
빼고와 생쥐 아내
,
세가지 보물
,
곰과 농부
,
은혜 갚은 바둑이
,
사랑의 삼총사
,
토끼 나라
,
검사와 여선생
,
나뭇가지에 꿴 호랑이들
,
금 노루
,
해와 달이 된 이야기
,
이윤복과 일기장
,
개미와 포수
,
미가와 원숭이
,
까치의 은혜
,
은혜 갚은 두루미
,
매구와 세 가지 병
,
복남이의 죽음
,
오뉘 탑
,
며느리의 선행
,
김유신과 천관사
,
도둑질한 아이와 어머니
,
사자 가죽을 쓴 나귀
,
개미
,
아들과 그림 사자
,
원숭이의 고기잡이 표제작인
‘
용궁의 개
’
는 마치 흥부와 놀부 얘기와 비슷하다
.
형은 심술궂고 욕심이 많고 동생은 착하고 가난하다
.
흥부처럼 형에게서 쫓겨난 동생은 어찌어찌 용궁으로 가서 용왕이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개를 얻어 온다
.
이 개가 하루 한 마리씩 산돼지를 몰아왔는데 동생은 그것을 팔아 결국은 풍족하게 살게 된다
.
이 일을 알게 된 욕심쟁이 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
개를 동생에게서 뺏어 자기 집으로 끌고 가보니 산돼지는커녕 자신과 식구들을 해코지만 했다
.
성이 크게 난 형은 개를 때려죽이고 만다
.
동생은 죽은 개를 찾아와 집 뒤 동산에 묻어주었는데 그 무덤에서 대나무가 솟았다
.
대나무가 자꾸자꾸 자라 마침내 하늘까지 닿아 하늘나라 쌀 창고 바닥을 뚫고 말았다
.
그렇게 되니 하늘나라 쌀이 동생네 집에 쏟아져 내려 벼락부자가 되었다
.
또 욕심쟁이 형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
개뼈다귀를 파와서 자기 집 마당 가운데다 묻고 쌀이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
아니나 다를까
?
대나무가 나더니 쑥쑥 자라서 하늘나라까지 올라갔는데 드디어 하늘님 똥구멍을 팍
!
쑤셔 버렸다
.
하늘나라 거름간에서 쏟아져 내린 것은 쌀도 보리도 아니고 똥물에 거름 따위 냄새나는 것들이었으니 욕심쟁이 형은 그것에 파묻혀서 죽고 말았다
.
41
편의 동화들은 표제작과 비슷한 권선징악의 이야기들로 선생님께서 다시 재구성하고 일선 교사들이나 유치원 등 동화구연가가 적절한 변화를 주면서 구연하기에 편하도록 해 놓았다
.
시의 적절한 비유와 해학이 곳곳에 숨어있고 그 비유와 해학이 결코 쉽게 웃어 넘어가지 않고 동화를 듣는 아이들의 마음에 메아리치면서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책머리에
<
부모님들에게
>
란 부제를 붙여 책을 내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
“
즐겨 동화를 읽게 하기 위하여
근래에 와서 상당수 어린이들이 동화를 즐겨 읽고
,
구연동화는 무조건 즐겨 듣는 경향인 것 같다
.
이런 경향은 보다 더 많은 어린이가 보다 더 재미있게 많은 동화를 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어린이 자신이 읽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동화를 선정하여 읽게 한다든가 저학년에서는 교사가 읽어 들려준다든가 구연동화로서 들려주어 흥미를 갖게 하면 자기가 읽을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읽어 나가게 될 것이다
.
본격적인 동화 일기 지도는
3
학년 때부터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 3
학년이 되면 옛 이야기나 동화의 줄거리를 잡는 능력도 확실해 지고 독서의욕도 높아져서 꽤 긴 문장도 읽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4
학년이 되면 꽤 이지적으로 동화 속에 담겨진 정신을 찾아 낼 수 까지 있게 되므로 내용을 파고 들어가 주인공의 입장과 그 이야기의 정경들을 상상하고 추리해 나가면서 읽을 수가 있게 된다
.·······”
그러면서 구연동화
,
동화 읽기 지도를 위한 조언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는데 이야기를 아이들이 스스로 한다든지
,
이야기회를 만들어 특정 시간을 이야기 하게 한다든지
,
읽고 싶은 동화를 스스로 찾게 한다든지 독서판을 교실에 설치해 놓고 독후감을 게시한다든지 하여 동화를 많이 읽게 하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
선생님은 말미에
,
“······
꾸준히 동화 읽기를 계속해 나간다면 어린이들은 굉장히 많은 동화를 바르게 즐겁게 읽게 되어 어린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해질 것은 물론
,
아름다운 마음씨
,
부드러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게 되어 보다 인생을 즐겁고 보람 있게 살 수 있게 되리라 믿어지는 바이다
.”
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
◆
선생님의 수필
선생님은
<
창녕문학
> <
창녕문화
>
등 문예지와 여러 신문 잡지에 많은 수필을 발표하셨다
.
선생님의 수필 주제는 대부분 교육자로서의 성찰과 우국지사의 면모를 내비치는 나라 사랑이었다
.
선생님께서는 오호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신 후 마을 길가에 무궁화를 대량 심어 나라꽃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셨다
.
<
창녕문학
> 24
집
(2000
년
)
에 발표하신 수필
「
다시 생각해 보는 단군신화와 단군상 수난
」
에서 선생님은 단군신화의 전승과 계승에 큰 관심을 보내고 있다
.
사실 한국 역사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이 단군신화도 내버리고 고조선조차 묵살해 버리는 현실에서 선생님은 북한의 예까지 들어가면서 단군신화를 옹호하고 단군을 한국인의 선조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신다
.
최근 이전하여 문을 열었던 국립중앙박물관조차 전시실에 게시된 우리나라의 연표에 고조선이 빠져 있었다는 신문보도를 보면 선생님께서 하늘에서 얼마나 분개하실까
?
“····
한말에 사직이 기울어질 때 자주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
일제하에서는 만주로 중국으로 망명한 사가
(
史家
)
들과 지사
(
志士
)
들 사이에서 대종교
(
大倧敎
)
로까지 발전하였다
.····”
고 밝히면서 단군 신화야 말로 민족성이나 고유사상의 원형으로 살려야 한다고 하셨다
.
◆
선생님의 즐거움
정년퇴임을 하신 후 선생님은 축구나 야구 경기가 마산에서 열리면 경기를 보러 자주 나들이를 하셨다
.
아마 고향 마을 학계리 명지에서 무료함을 달래고 그간 관심이 많았던 운동 경기를 마음 편하게 마음대로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
또 경남신문 등 신문에 나는 낱말 맞추기 퍼즐을 즐겨 하셨다
.
낱말 퍼즐은 네모난 칸에 가로 세로 주어진 풀이말을 읽고 서로 연결이 되어야 정답이 되는데 간혹 애매한 문제가 있어 맞추기에 힘들기도 하였다
.
선생님께서 애매하거나 알쏭달쏭한 문제가 있으면 곧잘 김현곤 선생님께 전화를 하셨고 마침 댁에 계시지 않아서 김 선생님과 통화가 되지 않으면 내게 전화를 하셨다
.
“
현우야
,
이러 이러 한 게 뭐꼬
?”
선생님께서 정답을 모르실 리 없지만 아마 김현곤 선생님의 답을 못 들었으니 제자의 시원찮은 대답이라도 들으셔야 마음이 놓였던 모양이었다
.
간혹 즉답을 하기에 애매한 것이 셍기면 한글사전을 뒤적여 선생님께 다시 전화를 드리면
,
“
맞다 맞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