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30일 1박2일 동안 부곡 모 호텔에서 친정어머니 90(구순)회 생신을 가족과 가까운 친척 등 5
0여명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취지는 어머니의 8남매 중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계신 이모세분(85세, 75세, 73세), 이모부 두 분을 위한 잔치였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어머니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언니, 동생하며 회포를 풀고 어린 시절을 상기 하
며 웃고 떠들고, 같이 노래 부르고 하는 일들이 어머니 생전에 마지막일 것’ 이라는 판단과 또 누군가
아프게 되면 네 자매가 함께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가슴에 두 아들을 묻고 며느리와 함께
살면서 두문불출 형제도 친척도 만나지 않는 이모 한 분을 위해서 였다.
오빠들과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진행 된 잔치는 다행히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함께해준 사촌, 육촌, 멀리 미국에서까지... 가슴 뭉클한 잔치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역할은 어머니와 이모들의 수행 비서다.
스위트룸에 4자매와 바닥에 요를 깐 수행비서는 12시가 넘고 두시가 넘어서도 도통주무시지를 않고, 나도 알 수 없는 이야기들로 밤을 세 울 기세다.
“내일 새벽에 밭 매러 갈 일 없으니 제발 새벽에 깨우지 말라”고 수행비서가 요청했지만, 5시 반에 임무에 충실한 수행비서가 먼저 일어나 배고프다는 네 자매를 위해 과일 깎아 드리고 떡도 대령하고, 네 자매를 모시고 안개 낀 부곡관광특구의 새벽산책에 나섰다.
문득, 막내이모가 “숙아! 우리 예전에 살 던 곳에 함 가 보까? 늘 부곡에 와도 생각만 있었지 거기를 한 번 못 가봤다.
동네가 그대로 있는지!” 하신다. “혹시? 이모! 학교가 좀 떨어져 있었고, 사택이 동네 안에 있었고, 집 앞에 동산이 있던 곳이 어디예요?
개울물도 있었던 것 같은데...”
“ 여기 아이가! 거문리에!! 부곡국민학교! ” 하신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50년을 훨씬 넘게 꿈속에서 찾아 헤매던,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던 곳!
어제 일처럼 너무도 생생한 유년시절의 행복했던 추억과 가슴 아픈 기억들! 살아오면서 힘들고 지칠 때 마다 자연스레 떠오르던 그곳이 지척이라니!
내가 계성국민학교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니, 그 다음 아버지의 발령지가 부곡이니까 여기 어디일 것이라고 늘 추측만 했지 누구에게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오사카 대학에서 유학을 마치고 20대초반에 한국에 돌아와 32세에 교감이 되었고, 내 기억에 우리는 늘 학교 사택에 살았었다.
그 시절은 한국 전쟁 후 라 외원(외국원조)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초콜릿, 껌, ‘말표 구두약’
통처럼 생긴 납작한 깡통에 든(지금생각하면 쨈, 버터, 치즈 같은 것)것들을 가져와서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입에 물리고, 잠투정하는 나를 달래는 엄마랑 아버지가 다투던 기억! 분유를 물에 찐하게 타서
밥 위에 쪄서 딱딱하게 굳혀 간식으로 먹던 기억!
오빠들이랑 앞동산에서 토끼먹일 풀 베다가 낫에 찍
힌 내 발등에 난, 아직도 선명한 흉터를 볼 때마다 생각나던 그곳! 외동딸을 너무나 사랑한 아버지가 학
교 내에 하얀 타일이 박힌 일본식 목욕탕에 데리고 갔던 일, 반짝이는 하얀 타일에 매료 되었던 일, 그
당시 막내이모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훤칠하게 잘 생기고 공부 많이 한 엘리트 형부와 큰언
니가 마냥 좋았기도 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지식인이라 하여 납북 되었던 아버지가 귀신의 몰골로 돌아
온 후 결핵을 앓아, 우리 집 마당 기슭의 가마솥에는 늘 뱀탕 아니면 개를 삶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
버지의 병수발에 매달리고 이모가 우리 6남매를 키웠다.
마침 둘째 아들이 호텔 앞에 세워둔 차 앞에서 잠에 취해 반 쯤 눈을 감고 얼쩡 거리 길래 아들과 할머
니 네 분 모시고 그 곳을 찾아갔다.
부곡초등학교는 신식 2층 건물로 변해 있었고, 그 주위에 아파트도
생겼다. 밥만 먹으면 올라가 뛰놀던 앞동산은 잔디와 풀만 가득한 민둥산 이었는데 수풀로 우거져 있
고, 동네는 이미 옛 자취는 없어지고 멋진 양옥들이 들어서 있었다.
동네 어귀에 차를 세울 때부터 부지
런한 동네 어른들이 우리를 주시하더니 하나 둘 우리주위로 몰려왔다. 이모와 나는 우리집을 찾기 시작
했다.
이모는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이 골목인 것 같다”고 “ 아니야 이모! 내 기억에는 골목이 이
렇게 넓지도 않았고, 우리집은 두 번째 집인 것 같은데?”
나와 이모는 다음골목 그 다음골목으로 흔적
을 찾아 올라갔다. 하!~~~ 그런데 너무도 충격적인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이모~~ 여기야!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세 살에서 다섯 살 까지 살았던 그 집이 폐가가 되어 그대로 있지 않은가?
통시,
곳간, 토끼를 키우던 곳, 가마솥 걸어 두던 곳, 본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
고, 이모는 그저 펑펑 눈물을 쏟았다. 화롯불에 통마늘과 밤을 구워주시던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 빨래
줄에 걸린 하얀 이불 호청 사이로 작은오빠와 숨바꼭질하다 작대기는 내가 넘어뜨렸는데 오빠만 혼나
던 일들, 그 집은 다시 유년시절로 돌아가 곳곳에서 이야기들이 툭! 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막내이모는
밭으로 변해버린 마당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중얼거린다.
“이곳은 가슴 아픈
사연이 너무 많아~~”
그러는 사이 온 동네 어르신이 다 모인 것 같다.
묻지도 않았는데 막내이모는 “
우리가 여기 살았어요” “ 요~는 교감 사택인데?” “우리언니가 그 교감 사모님 중에 한 사람이에요” 마
침 그 중에 어머니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모는 계속 눈물을 훔치며, “ 숙아! 사진 찍어서 나한테
좀 보내주라 글 하나 써야겠다.” 서울서 수필가로 활동하시는 막내 이모의 나지막하고 단호한 목소
리!!!
어느 화창한 가을날 오후! 나는 누군가와 그 동산에 올라 앉아 머~언 신작로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득
하게 먼 곳에서 하얀 상복과 두건을 쓰고, 한 손에는 빗자루를 든 큰오빠가 누군가와 함께 점점 다가오
고 있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