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 개비리길 252 걷기대회를 마치고
이흥기 남지읍장님의 인사 말씀으로 252 걷기대회 행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읍장님께서는 “인공적인 경관, 계획된 콘텐츠 속의 길이 아니라 서정적인 이야기가 흐르는 길로 자연이 주는 천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명품 길로 거듭날 것”이라며 “개비리길 주변 전통마을과 연계한 선비문화 체험, 임진왜란과 6·25 전쟁의 역사적 전적지를 연결해 이 땅의 아픈 기억과 선조의 얼을 되새기는 역사문화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씀을 하셨고, 남지읍 각 마을 이장님들의 격려와 후배인 이상주 군의원의 응원을 받기도 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다. 흔히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그려보라고 한다. 여는 말에서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그건 바로 우리 친구들 모두가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다는 배낭 허리띠에 주황색 색채의 실로 가방에 일일이 새겨놓은 이름 때문이리라.
252 친구들 한 명 한 명이 모여 우정의 강을 막힘없이 흐르게 하고, 우정의 산길을 탄탄하게 만들어 95세까지 함께할 수 있는 생명력이 긴 그런 우정을 가슴 깊이 새겨보자는 조현욱 회장의 그 깊은 뜻을 우리 모두 마음에 새기고, 감사의 마음으로 등에 진 채 창나루 주차장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후, 오솔길로 접어들자 낙동강이 넓은 팔을 벌린 채 우리를 반겨주었다. 오랜만에 나누는 안부가 참으로 살가웠다.
깎아지른 절벽과 좁은 길에 천천히 들어서자 낡으면서도 구수한 오래된 고향 냄새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벌써 옹달샘 쉼터를 지나 죽림쉼터에 도착을 했다. 그곳에서 모교 선배님이라고 하신 향토문화 해설사로부터 간단하게 개비리길 유래를 듣는 것도 재미가 솔솔 하였다.
여기서 남지 개비리길의 유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영아지 마을에 사는 황씨 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마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뜻의 남지 사투리)였다. 힘이 약했던 조리쟁이는 어미젖이 10개밖에 되지 않아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고 황씨 할아버지는 그런 조리쟁이를 가엾게 여겼었고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조리쟁이는 집에 남겨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등(山) 너머 시집간 황씨 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에 왔다 가면서 조리쟁이를 키우겠다며 시집인 알개실(용산리)로 데려갔다. 며칠 후 황씨 할아버지의 딸은 깜짝 놀랐다.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렁이가 젖을 주려고 등(山)을 넘어 온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후에 살펴보니 누렁이는 하루에 꼭 한 번씩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누렁이는 알개실 마을에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은 누렁이가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누렁이 뒤를 따라갔는데 누렁이는 낙동강을 따라 있는 절벽면의 급경사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못하고 강으로 떨어져 눈이 없는 곳을 따라 다녔던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높은 산 고개를 넘는 수고로움을 피하고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절벽)’로 다니게 되어 ‘개비리’라는 길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개’는 강가를 말하며 ‘비리’는 벼랑이란 뜻의 벼루에서 나온 말로서 강가 절벽 위에 난 길의 뜻으로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무튼, 개비리길의 그 유래를 생각하니 자못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조금 풀렸을 때 서부윤 친구가 준비한 부곡 막걸리를 족발과 함께 먹으며 휴식을 취한 후에 보물찾기 게임이 있었다. 그 옛날 학창시절 소풍을 생각하며 기획한 보물찾기 연출은 나름대로 뜻깊은 추억거리가 된 것 같았다. 일부러 상품도 문구류에 속하는 필통, 볼펜 등을 준비한 집행부의 그 깊은 뜻에 친구들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한참을 동심에 젖었을 때, 집행부의 명령이 하달되어 다시 싱싱한 낙동강과 마분산 절벽을 옆구리에 낀 채 걷기를 시작했다. 그 풍광이야말로 보는 이의 마음을 환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야생화 쉼터에 수많은 우정의 씨앗을 부려놓고 걷다 보니 영아지 개비리길 종점에 도착했다. 영아지 쉼터에서 그 마을 이장님의 농심(農心)이 묻어나는 음료를 마시며 다시 한 번 고향의 정을 느꼈다.
화장실 옆 대형 개비리길 안내판 앞에서 출신 초등학교별로 우정의 기념사진을 찍은 후에 곧장 침목계단으로 되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거기서부터는 그야말로 등산이 되는 것 같았다.
마분산 갈림길에서 길 잃은 미아가 된 친구들(호철, 판암, 인관, 성찬, 수민, 호득, 오규, 홍돌 등)이 있었다. 그 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친구들의 말은 뒤로 제치고 책임감으로 버티는 김호철 건강위원장의 명령에 무조건 따랐던 몇몇 친구들은 신전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초산 쪽으로 가다 다시 돌아오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다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다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는 승용차가 있어 발톱이 아픈 배수민을 그 차에 태워 보냈는데, 보내놓고 보니 그 미모(?) 때문에 납치라도 될까 봐 염려가 된 김호철 건강위원장은 급기야 그 차를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가 배수민 친구를 구출(?)하고, 다시 산행이 시작되었다. 송인관 부산회장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땀을 뻘뻘 흘리며 등산로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다 영아지 전망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조현욱 회장, 김흥수 부회장 등 동지를 만나 미아에서 해방되었다.
그 와중에도 신전마을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특히 남지중학교 총동창회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도와주셨던 고(故) 정민화 선배님의 후배 사랑을 송인관 부산회장이 입이 마르고 닳도록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우리 후배들 모두가 공감하리라 믿는다.
영아지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오솔길에 수북이 쌓인 낙엽이 참 인상적이었다. 농담 삼아 앞서가는 이금주와 이호득에게 한번 넘어져 보라고 했다. 마분산 '겨울연가'를 한 번 연출하도록 말이다. 그 오솔길은 누구에게나 고향길이 될 것 같았다. 사시사철 어느 때 누가 찾아도 고향을 찾은 것처럼 다정다감한 느낌을 한껏 안겨줄 테니까 말이다.
이곳에는 또 하나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적의 공격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이 말의 꼬리에 벌통을 매달아 개비리 뒤 진지에서 적진을 향해 달리게 했더니 말의 꼬리에 달린 벌통에서 수많은 벌떼가 쏟아져 나와 적들을 크게 교란시켜 의병들이 적을 물리쳤다 고 한다. 그러나 그만 말이 죽게 되어 장군은 말을 거두어 이곳에서 장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그것이 오늘날 말 무덤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개비리길’이라는 명칭보다는 이 글에서는 ‘252 영혼의 길’이라고 쓰고 싶다. 이 영혼의 길을 만들기 위해 바쁘고 바쁜 업무를 뒤로 미루고, 이곳 저곳에서 등불을 켜준 친구들, 우정의 아랫목이 따뜻해지도록 부지런히 군불을 지핀 친구들의 살가운 정을 생각하면 고마워서, 참 고마워서, 정말 고마워서 그 우정의 우물에 감히 고맙다는 형용사를 담글 수가 없을 것 같다. 오양환 총무가 말했던 것처럼 보약보다 더 귀한 감동과 행복의 시간이었다는 것에는 모두가 공감하리라 믿는다.
쪽빛으로 물든 낙동강, 황토색 흙길, 초록빛 죽림, 하늘을 이고 있는 영아지 전망대,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마분산 오솔길, 그리고 우리 252의 명품 우정이 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감흥을 자아냈던 남지 개비리길 걷기대회!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든 것일까?
필자는 서슴지 않고 조현욱 회장, 김흥수 수석부회장, 오양환 총무, 김호철 건강위원장, 신석주 재무, 진철숙 감사, 최원규 이사, 이호득 부회장 등 많은 친구들의 따뜻한 정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한 번 더 그 따뜻한 정에 고맙게 생각하며, 우리 252 조현욱 회장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건배사처럼 고향의 친구를 생각하며 남은 인생을 멋지게 보내길 기원해 본다. 친구들과 함께한 그 살가운 정은 고향의 낙동강처럼 우리들 마음에 늘 흐르고 있으리라.